서울을 시작으로 경기, 전남, 전북, 강원으로 확산
장애인노동운동을 넘어, 새로운 노동개념 제시
“이제는 K-노동”… 세계로 뻗어갈 권리중심공공일자리
기존 장애인일자리, 장애인복지와의 차별성은 과제
“K-POP, K-드라마에 이어, 이제는 K-노동이다.”
16일 이룸센터에서 열린 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박람회 토론회에서 나온 말이다. 생산성 중심의 노동 담론을 벗어나 온전히 장애인의 권리 생산에 초점을 맞춘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한국 시민사회뿐 아니라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도 주목하고 있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아래 전권협)가 16일 이룸센터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합니다’: 재활을 넘어, 권리생산 주체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 서울을 시작으로 경기, 전남, 전북, 강원으로 확산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노동영역에서 배제되어 비경제활동인구로 규정되었던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의 노동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일자리다. 노동자들은 권익옹호, 문화예술, 인권교육활동 등의 직무를 통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을 홍보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협약 이행을 모니터링한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지난해 서울에서 260명의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올해는 서울 275명, 경기 25명이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내년에는 전남, 전북, 강원 등 더 많은 지자체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도입할 예정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박경석 전권협 대표는 “서울시는 내년 350명의 예산 45억 원을 책정했고, 계약기간이 1년으로 길어져 퇴직금도 받을 수 있게 됐다”라며 “경기도는 25명으로 출발했는데 내년에 200명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고, 전남도 100명 정도로 예상한다. 전북과 강원에서도 도입할 예정으로,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일자리는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장애인 권리 획득이라는 목표가 있다”라며 “협약에서 제시한 대로 그 재정 책임은 정부와 지자체에 있다”며 일자리 확산에 정부의 참여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날 토론회에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전국 확산에 중요한 열쇠를 쥔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차정훈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촉진이사만이 토론회를 참관했다.
- 장애인노동운동을 넘어, 새로운 노동개념 제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장애인노동의 한계인 ‘직업재활’과 ‘보호 이념’을 벗어난 것에 그치지 않고, ‘생산성’, ‘이윤’ 중심의 노동 이념을 전복시켜 새로운 노동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정창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는 “이 일자리의 핵심은 그동안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장애인들에게 노동권을 보장한다’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권리를 생산하는 주체’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라며 “한 마디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권리생산노동’의 주체다”라고 정의했다.
이어 “권리생산노동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처럼 누군가를 배제하는 사회현실적인 조건과 세계의 공간성을 재편하는 과정이다”라며 “자본에 돈만 많이 벌어다주는 금융투기노동과 비교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유용한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가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장석준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장애인노동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개념이 자본주의 임금노동에 한정돼 있다 보니, 이 범위에서 포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라며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협소한 노동관념을 깨고 재구성하고 있다. 새로운 노동관념, 더 넓은 일 관념을 만들고 전파하는 게 장애인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장 부소장은 권리중심일자리를 ‘일자리보장제’의 모범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대규모 실업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나온 일자리보장제는 사회 체제 전환을 위한 공공의 가치를 가진 일자리에 사람들을 고용하고 그에 대한 재정을 정부가 조달하는 정책이다. 지난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이를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으며, 현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선 일자리보장제의 경제학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들이 경제자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정의당에서도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반한 ‘참여형 일자리보장제’를 대선 공약으로 준비 중이다.
이와 함께 교육, 훈련, 돌봄 같은 ‘사회적 기여자’에게 정부가 소득을 지급한다는 ‘참여소득’도 함께 이야기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세상의 쓸모에 맞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에 초점을 맞춰 노동세계를 재편한다는 점이다.
장 부소장은 “앞으로의 노동은 모든 사람이 짧은 노동을 하고, 높은 수준의 소득이 주어져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자리보장제’와 ‘참여소득’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뿌리는 달라도 한 곳으로 수렴될 수 있다”라며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그동안 생각했던 참여형 일자리보장제의 모범이다. 생각만 했던 것이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실현된 사례다”라고 의미를 밝혔다.
- “이제는 K-노동”… 세계로 뻗어갈 권리중심공공일자리
협약 27조는 고용 및 업무 환경에서 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하고, 민간·공공 영역에서 장애인의 고용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애인의 자유로운 직업 선택 보장 역시 당사국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또 현재 협약 27조에 대한 깊이있는 해석과 협약의 정신에 합치하는 해석을 담은 일반논평 8에 대한 초안이 나온 상황이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사무국장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직무는 협약의 홍보, 장애인식 개선, 장애차별적 노동 세계의 전환 실천, 최저임금 보장을 통한 장애인의 삶의 질 개선 등의 특징이 있다”이라며 “일반논평 8에 한국장애포럼 등 장애인운동단체가 적극적으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중심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그 결과 일반논평 8에는 장애인노동이 정당한 가치를 받지 못했다는 것과 더불어 장애인 노동권 침해는 장애차별주의적 사회로 인해 발생한다는 점 역시 명시했다.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곳곳에 ‘권리’라는 말이 많이 등장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도 장애인의 노동할 권리를 강조하고 있어,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대한 협약상의 근거도 충분하다.
이어 “분명히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앞서나가는 형태의 일자리다. 감히 K-노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노동계의 봉준호이자 방탄(소년단)이다”라고 강조했다.
- 기존 장애인일자리, 장애인복지와의 차별성은 과제
그렇다고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완벽한 제도라는 의미는 아니다. 저임금, 기초생활수급비 삭감 문제, 연속 고용 보장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장애인노동 개념은 제시했으나, 이를 둘러싼 현실적 조건은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다.
주 20시간 일하는 일반형일자리(시간제) 노동자는 월 91만 1240원을 받고, 주 15시간 일하는 복지일자리(참여형) 노동자는 월 68만 3430원을 받는다.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생계급여에서 소득인정액이 깎여, 실질적인 소득증가는 일반형일자리 41만 3372원, 복지형일자리 34만 5079원에 그친다. 또한 계약기간은 1년으로, 연속적인 고용이 보장되고 있지 못하다. 실상 껍데기는 다른 장애인일자리와 다르지 않다.
정창조 간사는 “저임금, 기초생활수급비 삭감 문제, 연속 고용 보장에 대해서는 계속 개선해야 한다. 또한 최중증장애인 비경제활동인구가 80%인 만큼 일자리의 확대가 필요하다”라며 “노동시간을 주 20시간, 15시간에 맞추기보다는 노동자의 신체조건과 욕구에 맞는 노동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노동시간유연제’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제시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기초생활수급비 보충성의 원리에 의해 소득인정액을 생계급여에서 깎는데, 아동·장애인·국가유공자에 대한 수당은 소득에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도 소득인정액 예외로 두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라며 “나아가 중증장애인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따지지 않고, 매월 단위의 최저임금 이상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노동시간유연제’보다는 ‘노동시간선택제’라는 용어로 바꾸면 보다 적극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했다.
무엇보다 기존의 시혜적·공급자중심적 장애인복지 체계의 관행을 적극적으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최한별 사무국장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장애인이 활동하고 비장애인이 감독’하며 ‘돈을 주는 프로그램’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이 새로운 노동의 의미를 노동자도, 지원인력들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