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장애여성공감 교육장에서 조미경 [숨]센터 소장이 ‘IL운동에서의 자기결정권과 의존의 관계’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장애인자립생활운동(아래 IL 운동)에서 말하는 자기결정권과 독립의 대치어로 쓰이는 의존의 개념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정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연이 열렸다.
장애여성공감의 기획강좌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쟁점’ 세 번째 강의가 3월 19일 오후 7시 장애여성공감 교육장에서 진행됐다. ‘IL 운동에서의 자기결정권과 의존의 관계’라는 주제로 조미경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소장이 IL 운동의 방향과 한계, 그리고 ‘독립’과 ‘의존’의 관계성에 관한 내용을 설명했다.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과 IL 운동의 배경
조 소장은 “대부분의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을 어디서 만났는지 질문하면 보통 지하철 혹은 마트라고 대답한다”며 “그러나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 직장에서 장애인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없다는 대답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장애인이 일상에서 배제되는 원인으로 조 소장은 교육권 박탈, 장애인 수용시설, 낮은 이동권, 청각·시각장애인 등의 정보 접근권 부재와 발달장애인 배제 등을 꼽았다. 조 소장은 “‘장애인이 학교 못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동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다’라는 인식이 장애인의 다양한 권리를 무력화시키는데, 이러한 인식은 장애인을 나와는 다른 존재로 여기는 타자화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타자화에 따른 이동, 교육, 노동 등 일상에서 장애인을 배제하고 박탈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해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제도와 정책을 주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바로 IL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IL 운동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과 통제권 주장: 미국의 IL 운동
미국 IL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에드 로버츠(Ed Roberts)이다. 그가 1962년 UC버클리 대학에 입학했을 때, 대학에는 사지마비에 호흡기 장애가 있는 그에게 맞는 기숙사가 없었다. 결국 그는 대학 옆 병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에드 로버츠는 그곳에서 만난 12명의 중증장애인과 ‘롤링퀴즈(Rolling Quads: 휠체어를 타고 굴러다니는 사지마비)’라는 모임을 결성해, 장애인에 대한 대학 내 장벽 제거와 자기 결정권 확보에 힘을 쏟았다.
이런 활동으로 1970년 UC 버클리에 신체장애학생프로그램(PDSP) 사무실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아파트, 활동보조인을 모집했다. 이후 1972년에 버클리IL센터가 열려 PDSP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IL 운동은 문제의 소재를 개인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재활과정에서 찾았고, 장애인의 사회적 역할을 환자(클라이언트)가 아니라 ‘소비자’로 정의했다. 문제의 해법은 전문가나 치료사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동료상담, 권익옹호, 자조, 소비자 주도 등의 활동으로 찾으려고 했다.
자립생활의 핵심가치는 △당사자 주권 △자기신뢰 △정치 및 경제적 권리로 전국 단위의 자립생활서비스를 체계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IL 서비스는 사회적 격변기에 시민권 운동, 소비자운동, 자조 운동, 탈의료화/시설화 운동 등 여러 곳의 개혁 사상을 흡수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독립’은 자기 의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활동 지원 서비스부터 편의시설을 갖춘 집까지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활용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가늠되었다.
미국 IL운동을 이끈 에디 로버츠가 인터뷰하는 모습(유튜브 영상 '바퀴는 자유다!'(https://www.youtube.com/watch?v=hwAWai9uYPY) 화면 갈무리)
IL 운동에서의 쟁점: 정상화, 당사자주의, 소비자주의
이러한 토대 위에서 IL 운동은 다양한 이론들을 축으로 발전해왔다. 여기에는 정상화 이론, 당사자주의, 소비자주의 등이 있는데, 조 소장은 이러한 이론들의 정의와 그에 따른 비판점을 소개했다.
‘정상화’ 이념은 탈시설화와 함께 IL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정상화 이론은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개인이나 집단이 생애주기별 다양한 경험을 선택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정상적인 사람들과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사회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상화 이론은 ‘정상’과 ‘비정상’이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어떤 특정한 삶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다른 삶은 ‘비정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조 소장은 “IL 센터에서도 정상적인 모델을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짜고 지원하는 경우가 있다”며 “예를 들어 장애 여성에게 주방 개조 사업을 펼치는데 이것은 여성의 성 역할을 정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나아가 특정한 삶에 귀속되어 자신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IL 운동은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는 ‘당사자주의’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는 ‘당사자’와 ‘동료’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당사자주의는 ‘당사자의 경험과 언어를 가치화하고 우선시해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비주체가 되기 쉬운 소수자가 주체로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조 소장은 “IL운동에서의 당사자주의는 자칫 ‘생물학적 장애’를 가진 ‘동료’만을 전제로 하거나, 소수의 이익을 위한 특권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당사자주의가 소비자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장애인복지에서 소비자주의는 미국의 자립생활, 영국의 지역사회보호 모델의 등장과 함께 주요 패러다임의 하나로 부상했다. 소비자라는 용어도 전문가 중심적인 ‘환자(클라이언트)’라는 용어의 한계를 지적한 것일 뿐 아니라, 복지서비스의 시혜적 차원을 넘어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고객으로서의 인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비자주권에 기반한 소비자주의는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수혜적 차원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이나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적극적인 권리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주의는 정상성을 기반으로 선택권이 제한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조 소장은 “신자유주의 시장 경쟁에서 선택의 자유는 선택의 개인 역량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따라서 소비자주의에서는 자기 결정권이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서비스 이용에 대한 자기 결정 능력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독립과 의존의 의미 재인식 필요성 있어”...“돌봄과 의존의 가치 드러내야”
자립 생활은 자기 일을 스스로 관리하는 것, 일상생활에 참여하는 것, 타인에 대한 신체적·심리적 의존을 최소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독립’이라는 말로 많이 쓰고, 그 반대어를 ‘의존’이라고 흔히 쓴다. 하지만 조 소장은 이러한 정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소장은 “사회에서는 의존이라는 말을 굉장히 부정적 의미로 쓰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든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며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이, 전기 등 많은 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으면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의존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는 점을 조 소장은 지적했다. 그는 “부인이 집안일을 할 때, 사회는 그것을 ‘남편을 돌본다’고 표현하지 않지만, 사회활동을 하고 경제력을 갖춘 남편에게는 ‘부인을 돌본다’는 표현을 쓴다”고 설명했다. 조 소장은 “이처럼 권력 관계, 역할, 자원이나 선택지 부재에 대한 구조와 맥락을 배제하고 소수자의 독립을 의존이라는 말로 폄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 소장은 “IL운동에서 자기결정권과 의존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며 “소수자의 삶을 통제하여 의존을 ‘개인 능력 문제’로 만드는 정상성 이론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소장은 “‘네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해놓고 모든 책임을 떠넘길 때 자기결정권 행사는 오히려 불가능하다”라며 “어떤 결정을 하든 책임을 함께 나눠서 지겠다는 관계와 조직이 있을 때 자기결정도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소장은 이어 “IL운동은 소수자의 연대를 통해 의존과 자기결정권이 확대되고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의미가 있다”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