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기획재정부를 규탄하며 장애인활동가들이 ‘돈만 아는 저질’이라고 스프레이 라카로 썼다. 사진 박승원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촉구하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이 세종정부청사 기획재정부 앞을 메웠다.
장애여성빈곤운동가 최옥란 열사의 기일인 26일 오후 3시, 세종시 기획재정부 앞에서 2019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아래 420공투단) 출범식과 15회 전국장애인대회가 열렸다. 420공투단은 올해 7월 장애등급제 폐지를 앞두고 OECD 평균 수준의 장애인복지예산 확대를 촉구했다.
장애여성빈곤운동가 최옥란 열사의 기일인 26일 오후 3시, 세종시 기획재정부 앞에서 2019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출범식과 15회 전국장애인대회가 열렸다. 사진 박승원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촉구하며 세종시 기획재정부 앞에 모인 장애인권활동가들. 사진 박승원
420공투단은 "2019년 7월은 장애등급제가 31년 만에 단계적으로 폐지되는 중요한 변화의 시기"라며 "하지만 OECD 꼴찌 수준의 장애인복지예산을 유지하는 장애등급제 폐지는 허울뿐이며, 예산 없는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는 단계적 사기행각이자 '가짜' 폐지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2018 장애통계연보에 따르면, 2014년 한국의 GDP 대비 장애 복지 지출 예산은 0.61%로 OECD 회원국 중 멕시코와 터키 다음으로 낮았다. OECD 회원국의 2013년 평균 GDP 대비 복지 예산 비율은 2.11%로 한국보다 3.5배 이상 높았다.
420공투단은 "31년 만의 변화를 맞이하는 장애등급제 폐지가 진정으로 장애인의 삶을 바꿔내기 위해서는 OECD 평균 수준의 장애인복지예산 확대와 더불어 소득·사회서비스·노동·이동·주거 영역에서의 제도 개편과 예산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OECD 평균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장애인복지예산 2조 8천억 원에서 8조 원으로 예산이 확대되어야 한다.
420공투단은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위한 예산 확대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개인별 맞춤형 다양한 지원 서비스 보장 △장애인거주시설 폐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등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안을 가지고 420공투단은 26일부터 27일까지 기획재정부 앞에서 1박 2일 노숙 투쟁에 돌입한다.
이날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약 500여명의 장애운동활동가들이 세종시에 모였다. 사전행사인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 제정촉구 결의대회'를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마무리한 참여자들은 기획재정부 앞까지 행진했다.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를 보건복지부 앞에서 진행한 후, 기획재정부 앞까지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박승원
2005년 12월, 경남 함안에서 홀로 살던 한 장애인이 자기 집에서 얼어 죽었다. 한파에 보일러가 터져 물이 방으로 흘러들어왔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밑불이 되어 2006년, 중증장애인의 생존과 안전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장애계는 장애인활동지원제도 도입 투쟁을 시작했다. 한강대교를 기고, 단식하고, 삭발하고, 정부기관을 점거한 끝에 활동지원서비스는 제도화되었다.
420공투단 참여단체인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최용기 대표는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 정부였는데,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었고, 보건복지부 장관은 유시민 씨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줄기차게 활동지원 24시간 보장, 자부담 폐지, 65세 연령 제한 폐지를 요구했으나 이 요구는 지금까지도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대표는 "누군가 죽고 나서야, 끈질기게 투쟁하고 나서야 정부는 활동지원제도를 조금씩 개선해왔으나 여전히 장애인의 필요가 아니라 예산에 활동지원 인정점수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7월에 장애등급제가 드디어 폐지되는데, 그 이후에는 더이상 장애인이 무력하게 얼어 죽고, 불타 죽고, 호흡기가 빠져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장애인의 삶에 더 귀를 기울이고 예산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정부 부처들, 특히 기재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6일 오후 3시, 세종시 기획재정부 앞에서 열린 15회 전국장애인대회에서 발언하는 사람들. 사진 박승원
전국장애인부모연대(아래 부모연대) 회원들은 '발달장애 국가책임제'의 제대로 된 도입을 촉구하며 정부세종청사 복지부 건물을 지난 12일부터 25일까지 점거했다. 정부가 지난해 9월 '발달장애 생애주기별 종합지원계획'을 발표하긴 했지만, 터무니없이 낮은 예산과 실효성 없는 사업 계획으로 발달장애인 가족들에게 '희망 고문'만 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기만을 멈춰라!’ 부모연대,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도입 촉구 2차 농성 돌입).
김신애 부모연대 부회장은 "장애인 가족지원 사업을 하며 많은 장애인 가족들을 만나는데, 부모가 발달장애인을 돌보다가 죽으면 형제, 자매가 돌보고 있더라"라며 "형제, 자매에게 학대와 폭력을 당하는 발달장애인을 너무 많이 본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전했다.
김 부회장은 "발달장애 국가책임제가 도입되지 않는 이상,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서로가 지칠 때까지 서로의 짐이 되다 장애인은 결국 시설로 가거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며 "이게 2019년 한국에서 어떻게 용인될 수 있는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고 분노를 토했다. 이어 그는 "기재부를 대상으로 한 투쟁을 끝까지 이어갈 것이다. 발달장애인 동지들을 포함한 모든 장애인 당사자들의 손을 잡고 끝까지 연대하며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장애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는 빈곤이다. 장애인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있기 때문인데, 이마저도 부양의무자기준때문에 발목을 잡히기 일쑤다. 장애와 빈곤의 연결은 2001년 명동성당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한 최옥란 열사의 투쟁을 통해 더욱 명징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는 장애인차별철폐의날인 4월 20일까지 계속되는 한 달여간의 집중 투쟁이 최옥란 열사의 기일인 3월 26일부터 시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획재정부 앞 도로에 스프레이 라카로 “부양의무제 완전 폐지 촉구”라고 쓰여 있다. 사진 박승원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최옥란 열사가 2001년 12월, 명동성당 천막 농성을 시작하며 쓴 농성결의문에는 '저의 텐트농성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포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희망'으로 나아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최 열사의 용기 위에 우리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사무국장은 "5년간의 광화문 지하차도 농성 끝에 우리는 장애등급제 폐지 TF, 장애인수용시설 폐지 TF와 더불어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TF를 끌어냈다"라며 "그러나 바로 이 건물(기재부)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늘 '조금 더 기다려라. 한 번에 되는 게 어디 있냐. 예산이 없다. 혼자 다 쓰려고 하냐'는 말로 제도 변화와 예산 확대를 지연시켜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는 사이 또 다른 '최옥란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지난해에도 부양의무자기준때문에 기초생활수급에서 탈락한 희귀난치성질환 장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며 "그의 친구는 '정부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했다는데, 내 친구는 대체 왜 죽어야 했느냐'라며 애끊는 심정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알량한 숫자 조정이 어떤 이들의 삶을 어떻게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라며 "그러나 이렇게 높은 담장 안에서 문 한 번 열지 않고, 이러한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런 상황을 도무지 모르는 것 같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김 사무국장은 "하지만 최 열사의 '희망'의 투쟁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우리도 오늘의 투쟁이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으로 열심히 함께 싸우자"고 강조했다.
대회가 끝난 후, 참여자들은 기재부 건물 앞 도로에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인수용시설 폐지', '부양의무제 완전 폐지하라' 등의 문구를 스프레이 라카로 새겼다. 이어 수차례 기재부 장관 면담 요청 공문을 보냈음에도 아무런 답변이 없는 기재부를 규탄하며 기재부 주차장 길목을 막고 '퇴근 저지 투쟁'을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약 두 시간가량 벌였다.
장애인활동가들이 기획재정부 건물 앞 도로에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인수용시설 폐지’, ‘부양의무제 완전 폐지하라’ 등의 문구를 스프레이 라카로 새기고 있다. 기획재정부 앞 주차장 길목을 막고 ‘퇴근 저지 투쟁’을 하는 사람들. 사진 박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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