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탈시설 논의에서 늘 반대 의견으로 제기되는 주장은 "시설 거주인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 "탈시설은 시설 거주인들의 자립준비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구시립희망원(아래 시립희망원) 탈시설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제기되었는데, 시립희망원 인권침해와 비리 문제 해결을 약속했던 모든 기관-복지부, 대구시, 그리고 새로 부임한 시립희망원 원장들까지-에서 바로 이 ‘당사자의 탈시설 욕구 및 준비 상태 확인’을 강조하며 ‘점진적 탈시설’의 당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장애계는 ‘오랜 시간 시설의 삶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확고한 자립 의지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시설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다 ‘탈시설 욕구는 없지만, 시설 폐쇄로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나온’ 두 사람이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마흔에 시설 나와 누리게 된 일상, ‘내가 입고 싶은 옷은 내가 골라’
조민정 씨(가운데)와 활동지원사 이경희 씨(왼쪽)가 조 씨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대구사람센터 체험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박승원
조민정 씨(41세)는 지난해 7월 대구시립희망원(아래 시립희망원) 장애인 거주시설 시민마을(구 글라라의 집)에서 나왔다. '자립의지'가 있어서 탈시설을 결심했던 건 아니었다. 시립희망원 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해 2018년 12월까지 장애인거주시설인 시민마을을 우선 폐쇄하겠다는 대구시의 결정 때문에 조 씨는 20여년간 살았던 시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직원들이 '민정 씨 밖에 나가 살고 싶냐'고 묻기 시작했다. 조 씨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혼자 나가는 게 두려워 외출도 잘 하지 않았던 그다.
조 씨는 중학생 때 교통사고로 아주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를 갖게 되었고, 병원에서 곧장 시립희망원으로 거처가 옮겨졌다. 조 씨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따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20년가량을 시립희망원에서 살아왔다. 조 씨가 '시설 밖의 생활'에 대한 권유를 들었을 때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민정 씨가 당시의 두려움을 설명했다.
"시설 선생님들이 (시설에서) 나가면 잘해주는 사람들(활동지원사)이 있다고 설명해줬어요. 그래도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무서웠어요. 어쨌든 희망원 없어진다고 해서 나와야 했어요. 다른 시설로 갈까 생각했는데, 희망원에서 친해진 친구랑 헤어질 수도 있다고 해서 그냥 (탈시설 하기로 했어요)."
시립희망원에서 입던 옷가지며 소지품을 챙기니 상자 두 개가 됐다. 그 박스들을 들고 민정 씨는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사람센터)가 운영하는 체험홈으로 입주했다. 그러나 박스를 열어볼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민정 씨가 희망원에서 나올 때 소지품과 옷을 담아온 박스 두 개가 옷장 위에 올려져 있다. 사진 박승원
시립희망원에서 살 때는 '누가 잡아갈까 봐 무서워서' 외출도 꺼렸던 조 씨는 시설에서 나온 후 매일같이 대구 시내를 누빈다. 전동휠체어 운전을 대신해 주는 활동지원사와 함께라 든든하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 씨의 유일한 취미는 '아이쇼핑'. 주된 쇼핑 품목은 리본이나 레이스, 큐빅 등이 달린 옷이나 화려한 액세서리다.
"민정 씨가 다른 취미는 딱히 없어요. 별로 안 좋아해 티비도. 나가서 뭐 구경하는 거, 간식 사 먹는 거, 그런 거 좋아해서 매일 나가죠. 어제도 제가 안 오는 날인데, 오늘 와서 보니까 청바지 만 원 주고 하나 샀데? 지금 입은 거 이거요. (조 씨가 입은 청바지는 바지 밑단이 풀린듯한 디테일이 들어가고, 무릎 부분이 찢어진, 요즘 유행하는 바지였다) 서문시장이나 반월당 지하상가 많이 가고. 저기 탑마트라고 큰 마트 있어요. 거기도 자주 가고. 나는 '아유, 민정 씨 너무 안 요란하나, 움직이기 편한 옷 사지' 하는데 확실히 젊은 아가씨라서 그런가 이런 옷을 좋아하더라고요. 우리야 뭐 아줌마들이니까 좀 점잖은 거 입었으면 싶지만은, 입고 싶은 거 입어야지 뭐." (조민정 씨의 활동지원사 이경희 씨)
최근에는 적은 돈이지만 적금도 들기 시작했다. 적금의 목표는 '금목걸이 사기'. 액세서리를 좋아해서 많이 샀지만 알레르기가 있어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센터 체험홈 담당자와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하는 자치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금목걸이를 사기로 결정했다.
조 씨의 옷장을 열자 시설에 있을 때 입었던 옷과 탈시설 후 구매한 옷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시설에서 입었던 옷은 차분한 색의 운동복, 시설에서 나와 조 씨가 직접 산 옷은 화려한 무늬에 속이 비치는 소재의 소매, 가슴팍에는 커다란 리본이 달린 것이었다. 조 씨가 "예쁜 옷 안 입고 있어서 카메라 들고 오면 못 들어오게 하려고 했다"고 장난스럽게 웃더니 이내 오후에 어디로 나갈지 활동지원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민정 씨가 희망원에서 입었던 옷(왼쪽)과 최근 구매한 옷(오른쪽). 색깔과 모양, 재질에서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사진 박승원
'시설로 돌려보내 달라'며 단식투쟁 1년 후… "다시 시설 들어가면 도망 나올 거야"
시민마을에서 지난해 5월 탈시설한 정종삼 씨(65세) 역시 세련된 멋쟁이다. 그가 특히 즐기는 패션 아이템은 스카프. 하늘하늘하고 밝은 빛깔의 스카프는 그가 친구를 만나러 갈 때나 제주도에 놀러 갈 때마다 그의 목에서 나부낀다. 스카프가 가지런히 걸려있는 옷장은 조금 휑한데, 시립희망원에서 살 때 입었던 옷을 죄다 버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거기서 준 옷들은 보기가 싫어서, 다 버리고 왔어. 그래서 옷이 별로 없어"라며 정 씨는 혀를 찼다. 조민정 씨처럼, 정 씨도 시설에서 나와 취향에 맞는 옷을 하나둘씩 사 모으고 있다.
방 한쪽 벽에 걸린 중후한 '신상' 재킷에서 눈을 돌리자 이번에는 침대 머리맡에 걸린 헤드폰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디자인과 색상이다. 시립희망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트에서 정 씨가 직접 고른 것이다. "내가 고르고, 활동지원사한테 돈 주면서 계산 좀 해달라 했지." 정 씨는 '안목이 좋다'는 말에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드폰은 라디오를 들을 때 쓴다. 라디오는 주로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듣는데, 정 씨는 특히 비 오는 날이 궁금하다. "비 오면 좋지. 내가 옛날에 머슴살이했다. 비 오면 농사 잘되니까 좋아요." 과연 그의 집에는 꽃이며 상추 등을 심은 화분이 눈에 띈다. 방 한쪽, 그의 눈이 닿는 곳에 열대어들이 바삐 움직이는 어항도 있다.
정종삼 씨의 옷장에 스카프(왼쪽 위)가 걸려있다. 옷장 옆 벽에는 얼마 전 새로 산 재킷이 걸려있다. 사진 박승원 정종삼 씨 방 한쪽에는 화분과 열대어 어항이 있다. 사진 박승원
젊은 정종삼은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다.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라 배운 것이 없어도 건장한 몸이 있으니 먹고 살 수 있었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난 그는 스무살 때 서울에 왔다. 뚝섬 인근 곤로 공장에서 일도 하고, 고물을 주워다 팔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진 미아리 '대지 극장'에 자주 갔던 기억도 선연하다. 먹고 살길을 찾다 삼천포에서 고기 잡는 일도 하게 됐다. 그리고 바닷일을 하던 서른다섯 어느 날, 뇌졸중이 그의 크고 건장한 몸을 덮쳤다.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자 그의 몸은 더이상 든든한 자산이 아니었다.
누님과 남동생 집을 전전하다가 정 씨는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던 한 '갱생원'에 들어갔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혈압이 치솟았고,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갱생원에서 2년 정도 있으면서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 씨는 그 길로 병원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대구 누나 집으로 도망쳤다.
"거기가 얼마나 거친데. 그런데 있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맞아 죽으니까 도망 나왔지"라고 정 씨는 웃으며 설명했다. 그러나 누나 집에서도 오래 있지는 못했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했고, 동생 수발드느라 몸과 마음 모두 고생하는 누나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는 누나 집에서도 도망쳐 나왔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힘 좋았거든 내가. 어떻게 혼자 살아볼라고 했는데, 1년 후에 나를 누나가 찾아온 거야. 그래 누나 따라 다시 집으로 갔지. 가서 한 반년 있으니까 누나가 나를 데리고 거기로 갔어, 희망원에를. 그런데 거기서도 2년 있다가 도망 나왔어. 도저히 못 살겠더라고. 그런데 누나가 또 찾았어. 누나가 나 때문에 마음고생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 뒤로는 도망 안 갔어. 쭉 살았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더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죄책감 아래 묻혔다. 그 뒤로 그는 시립희망원에서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이 '당연'이 흔들렸다. 그가 지내던 장애인거주시설 시민마을(구 글라라의 집)이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퇴소했다. 들어올 때 '입소 의지'가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처럼, 그는 시설에서 나갈 때도 딱히 의지를 가지고 나온 게 아니었다.
퇴소하기 전 탈시설 단기체험을 해봤고, 시설 직원들로부터도 다양한 자립 지원 제도에 대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나가서 사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너무 오래 시설 안에서만 살았는데, 나가서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그리고 탈시설 직후, 그는 엄청난 문제에 직면했다. 활동지원서비스 인정조사에서 2급 판정을 받은 것이다. 정 씨는 한 달에 153시간, 하루 고작 5시간꼴로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정종삼 씨의 활동지원사가 누워있는 정 씨에게 안약을 넣어주고 있다. 사진 박승원
정 씨는 그때를 떠올리다 몸서리를 치며 '정말 죽을 뻔했다'고 한숨 쉬었다. "아이. 그때는 (시립)희망원 다시 들어가고 싶었어. 정말 죽을 뻔했어. 나는 혼자 옷도 제대로 못 입는데, 오후에 활동보조인(활동지원사) 가고 나면, 그때부터 꼼짝없이 굶는 거야. 아침까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그래서 그는 '단식 침묵시위'를 시작했다. '이렇게 굶으면 희망원에 도로 넣어 주겠지'하는 심산에서였다. 밥도 거의 먹지 않고, 누가 와서 인사를 해도 침대에 누워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 시설이 좋아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걸, 그를 지원하는 사람센터 활동가들은 오랜 탈시설 지원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시설에서 반평생 살다 나온 이들의 형편과 사정은 제도의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면 이제부터 고려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센터를 비롯한 장애계는 활동지원 서비스 판정을 하는 국민연금공단에 단체로 항의 방문을 했고, 정 씨는 이날 생애 첫 기자회견을 해봤다. (관련 기사: 활동지원 신청한 장애인에게 "시설에서 왜 나왔느냐"는 연금공단 직원)
싸우고 항의하니 바뀌는 것이 있었다. 국민연금공단은 정 씨에 대한 평가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재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정 씨는 활동지원 451시간(탈시설 지원 시간 포함)을 받게 되었다. 활동지원 시간이 늘어나면서 정 씨의 달력도 빼곡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4월 8일부터 10일까지는 제주도 여행, 3일과 11일 기자회견, 17일엔 대구시청 앞 행진, 19일에는 '서울 1박 2일 집회', 4월 13일 '최호환 씨랑 강정보'.
최호환 씨가 누군지 묻자 정 씨가 베개 밑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보여준다. 1번부터 20번까지, 핸드폰 단축번호와 저장된 사람 또는 기관명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최호환 씨는 시립희망원에서 만난 친구다. 활동지원사들이 "아, 호환씨"하며 대번에 알 정도로 자주 만나고 있다. 같이 나들이도 가고 좋아하는 짜장면도 먹는다. 시설에서 살 때는 일주일에 한 번 돌아오는 장날, 허가를 받아야 했던 외출이 이제는 자유롭다.
활동지원사와 외출을 나간 정종삼 씨가 길에서 대구사람센터 활동가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박승원
물론 시설에서 나온 후 정 씨의 삶이 180도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방 안에서 티비를 보는 시간이 길고, 활동지원 시간도 부족해 활동에 제약이 있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서 좋다. 손님에게 대접할 음료수와 과일을 직접 시장에 가서 사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원할 때 언제든 외출을 나갈 수 있어서 좋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좋다. 이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 씨는 "다 좋다"며 벙긋 웃는다.
"시설 안에선 자립에 대한 정보 있어도 두려움에 압도돼... 직접 나와서 살아봐야 알 수 있어"
조민정 씨와 정종삼 씨, 두 사람의 이야기 앞에서 '시설 거주인의 자립 의지 확인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무색해진다. 두 사람은 모두 자립 의지와 준비 없이 시설 밖 생활을 시작했으나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즉, 자립 의지나 장애인 당사자의 준비 정도는 탈시설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이들은 삶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시립희망원 탈시설 예산 책정을 거부하며 '거주인들이 강제로 들어갔다고 강제로 나오게 할 수는 없지 않냐'고 말했고, 시립희망원에 새로 부임한 원장들은 2030년까지 200명 규모로 축소(2018년 12월 31일 기준, 전체 거주인 861명)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부임했음에도 여전히 '긴 호흡으로 주거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사실상 시설 유지를 주장하고 있으며(관련 기사: ‘정부-대구시-사회서비스원’ 삼각지대 빠진 희망원, 거주인들은 죽어가고 있다), 대구시는 '(폐쇄된 시민마을 거주인 중 중증발달장애인은) 자립 욕구를 파악할 수 없으니 다른 시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립희망원에서 '자립의지'없이 지역사회로 나온 두 사람에게서 공통으로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자립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더라도 시설 안에 있을 때는 두려움이 많았다. 지역사회에서 적절한 지원이 주어지고 직접 그 삶을 살아보고 나서야 시설이 내 삶에서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과 1년 전, '나를 다시 시설로 보내지 않으면 이대로 굶어 죽겠다'던 정종삼 씨에게 지금 누군가 다시 시설로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지 물었다. 그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로 웃으며 목청을 높였다. "이제는 안 해. 나 시설에 넣는다고 옛날처럼 도망 나올 거야."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 정종삼 씨가 아파트 복도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있다. 사진 박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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