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원재 1주기에 부쳐
2025년 7월 17일, 비가 내렸다. 국정기획위원회 앞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나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국정과제로 약속하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길 건너에서는 침대형 휠체어에 누운 채로 보완대체의사소통(AAC)을 이용해 발언하는 사람이 있었다. 발언문의 제목은 「보통의 하루」였다. 기자회견 도중 나는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짐을 챙겨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날 나는 길 건너편에 서 있었고, 그는 누워 있었다. 그것이 이원재 님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두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오는 9월 24일이 1주기다. 내가 아는 그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기록 속에 있다. 그와 3년을 함께 산 서대문하우스(대한성공회유지재단 지원주택 주거지원센터) 강자영 센터장의 글, 그가 남긴 두 편의 발언문, 몇 편의 기사, 1주기 자립 포럼에서 들은 이야기들. 이 글은 그 기록들을 빌려 쓴다.
천장과 태블릿
그는 23년 5개월을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았다. 1998년 서울에서 유기된 채 발견되었고, 뇌병변과 발달장애를 함께 가진 와상 중증장애인이었다. 중증중복장애인, 와상장애인, 일상적으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 이런 몸은 시설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오랜 상식이었다. 그는 그 상식이 가리키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시절 아침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천장과 형광등이었다. 시설에서는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갈아서 먹었다. 뭘 입을지, 뭘 볼지, 누구를 만날지는 늘 정해져 있었고, 그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도 혼자 있고 싶다. 나 혼자 이불 덮고, 내가 보고 싶은 티비를 내 방에서 편하게 보고 싶다.”
2022년 7월 25일, 서대문구 장애인지원주택 201호로 이사하면서 그의 눈높이가 바뀌었다. 누워 있는 시선에 정확히 맞춰 태블릿이 놓였다. 그 옆에 포켓몬 카드와 닌텐도 게임기와 물고기 어항이 자리 잡았다. 활동지원사와 동네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직접 골라 계산했고, 아침으로 새우채소볶음밥을 먹고, 태블릿으로 유튜브 먹방을 봤다. 월요일 오전이면 물리치료사가 집으로 왔고, 한 달에 한 번 주치의가 찾아왔다.
“지금은 내가 고른 것들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누워서 탈 수 있는 차를 타고 여행도 갔다. 창밖으로 하늘과 비를 보았고, 바다에서는 물에 둥둥 뜨는 느낌이 편안했다고 했다. 바닷바람이 너무 추워서 다음엔 안 가겠다고 하면서도,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 목욕은 여전히 두려웠다. 목욕침대로 옮겨질 때마다 어디 부딪힐까 무섭다고 했고, 휠체어가 드나들기엔 화장실 문이 좁았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지금, 저는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 인생 첫 직장을 얻었다. 여름 햇볕 아래 선전전에 나갔다가 팔의 흰 살결이 껍질처럼 벗겨졌다. 스물다섯 생일에는 직장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지원자들이 그가 좋아하는 캐릭터 풍선을 그의 시선이 닿는 천장에 붙였고, 그는 풍선에 바람이 다 빠질 때까지 떼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권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노동권이라고 답했다. 2023년 말 서울시가 그 일자리를 없애면서, 그는 400명이 넘는 동료들과 함께 일자리를 잃었다.
2024년 2월, 서울시 지원주택 입주 공고에 새로운 규정이 생겼다. ‘와상 등 24시간 돌봄 필요자는 입주 대상에서 제외한다.’ 그 한 줄이 가리키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말했다.
“24시간 도움이 필요한 최중증장애인들도 저처럼 자립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으니 시설에서 나와서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은 피해의 고발이 아니라 가능성의 실증이었다. 그의 투쟁으로 그 문구는 지워졌다. 대신 지금은 개별 심사에서 그와 같은 몸들이 떨어지고 있다. 보이는 문장은 지워졌고, 보이지 않는 심사가 남았다. 마치 장애인을 등급으로 나누는 등급제는 사라졌지만, 장애인 서비스 종합 지원조사가 남아있듯이.
키링
강자영 센터장은 원래 거주시설 ‘도란도란’의 노동자였다. 동료들과 함께 거주인 18명 전원을 지역사회로 내보내고 스스로 그 시설의 문을 닫은 사람이다. 그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산다는 건 비장애인 중심의 틀과 하나하나 부딪히는 일이라고 썼다. 그가 든 예 가운데 하나가 와상장애인을 본 적이 없어 당황하는 병원이었다.
그가 하는 일도, 원재 님이 받던 지원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2006년 4월 27일, 장애인 49명이 한강대교를 막고 휠체어에서 내려와 여섯 시간을 기었다. 서울시가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을 책임지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장애계는 지하철 바닥을 기며, 장애인도 시민으로서 감옥 같은 거주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장애인권리예산을 요구하고 있다. 자립생활 운동은 판정당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내가 선택한 자리에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발명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장애운동은 늘 이동하며 싸워왔다. 거리를 행진하고, 다리를 기어서 건너고, 출근길 지하철에 오르면서. 그렇게 몸이 이동한 만큼 사회의 기준도 함께 옮겨 왔다.
판정은 몸을 숫자로 바꾸는 일이다. 몇 급인지, 몇 시간이 필요한지, 어느 항목에 해당하는지. 지원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간다. 서대문하우스에서 건강권 지원을 맡은 코디네이터는 지원의 핵심이 ‘관찰’이라고 말한다. 유동식을 권고받은 사람이 일반식을 원하면 힘을 쓸 수 있는 근육을 함께 찾아가며 시도해보고, 자기 몸이 궁금하다고 하면 촬영해서 보여주고, 그렇게 살핀 것을 주치의에게 전하고 병원에 동행하는 일이다.
2022년 가을, 그는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세브란스 응급실에 갔고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그 경험을 두고 그는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갈 수 있는 병원이 있어서, 지역에서 혼자 살아도 괜찮겠다는 안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때는 병원에 갈 수 있었다.
2025년 8월 25일, 그는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 9월, 강자영 센터장은 매일 오후 4시 서울의료원 중환자실 앞에 있었다. 면회는 30분, 두 사람까지였다. 원재 님의 침대는 큰 창을 등지고 있었다. 창밖은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계절을 볼 수 없었다. 양손은 묶여 있었고, 기계음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의 글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센터장은 원재 님이 좋아하던 『신비아파트』 키링을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달았다. 간호사에게는 이렇게 부탁했다. ‘챠르르 소리를 내면 좋아해요.’ 어느 날은 직장 동료와 이웃들의 영상편지를 들고 들어갔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반가운 목소리에 한 번, 영상 속 얼굴들에 또 한 번.
서류
9월 12일, 기관절개 수술이 연골 구조의 특이성으로 실패했다. 의료진은 상급종합병원 전원을 의뢰했다. 9월 16일, 신촌세브란스를 비롯한 상급종합병원들이 받지 않았다. 사유는 그의 폐도, 그의 연골도 아니었다. 법적 보호자가 없는 ‘무연고자’라는 것이었다.
3년 동안 매일 그를 지원해온 사람들은 「의료법」상 보호자가 아니었다. 센터장은 이렇게 썼다. “혈연으로 엮인 가족공동체도 법적 대리인도 아닌 우리에게는 원재씨의 상태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9월 18일, 그들은 서대문구청에서 하루 만에 임시보호자 공문을 받아 중환자실에 들이밀었다. 주말이 지났다. 9월 22일에 돌아온 답은 “상태 악화로 전원 불가”였다. 9월 24일 새벽 5시 14분, 그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탈시설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가족의 반대인 현실에서, 가족이 없어서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 농담처럼 돈다. 무연고였기에 그는 시설을 나올 수 있었다. 무연고였기에 그는 병원을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무연고였기에 죽은 뒤에도 가족을 찾는 공지와 장례주관자 지정을 기다려야 했다.
닷새 뒤 추도식장 테이블에는 신비아파트 키링이 걸려 있었다. 동료들과 대결하려고 새로 사둔 포켓몬 카드, 친구와 함께 완성한 비행기 레고, 넷플릭스가 돌아가는 태블릿이 그 곁에 놓였다. 가운데에는 가을 들꽃에 둘러싸인 휠체어가 비어 있었다. 그와 함께 산 사람들은 무연고자에게 베풀듯 주어지는 공영장례를 거부하고, 그 자리를 탈시설 장애인장으로 꾸렸다. 그날 나는 그가 남긴 포켓몬 카드 한 팩을 받았다.
장례식장에서 들은 말
장례식장에서 원재 님의 주치의에게 이런 설명을 들었다. 그의 몸 특성으로는 수술을 받았더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다고. 그는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장례식장에서가 아니라 병원에서 받아냈어야 했다.
그는 평생 의료적 기준에 의해 판단되어 온 몸이었다. 와상, 최중증, 24시간 돌봄 필요자. 시설의 입소 서류와 서울시의 공고와 병원의 차트에서 그의 몸은 끊임없이 분류되고 판정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누군가 그의 몸을 들여다봐야 했던 그 순간, 병원은 몸 대신 신분을 보았다.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이 겨눈 것은 등급표가 아니라 이 사회가 장애인을 판정하는 시선이었다. 장애인을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의료적 기준으로 분류하고, 그에 맞추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서비스의 총량을 통제함으로써 장애인의 권리를 조각내는 그 태도였다. 2019년 7월 등급은 사라졌지만 수급 자격은 개별 심사로 넘어갔고, 장애계는 그 이후로 ‘가짜 폐지’라 말하고 있다. 그 시선은 병원에 남아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판정은 의료적 지원을 위한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신분이었다.
원재 님의 죽음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다루어졌고, 보건복지부 장관의 입에서 방안을 찾아보겠다는 답변이 나왔다. 1년이 지났지만 이 사회가 무연고자를 대하는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원재 님의 전원이 막혀 있다는 연락을 받은 날, 나는 1년 중 진보적 장애운동의 가장 큰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지원자들은 임시보호자 자격을 우선 신청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나는 임시보호자 자격을 얻고도 병원이 거부하면 그때 함께 항의하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그때’는 오지 않았다.
행사 중이었더라도, 그 순간 뛰쳐나가 병원에 따졌어야 했나. 무연고자고 나발이고 우선 살려놓고 보는 것이 병원이 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나는 공급자와 정부의 행정 편의주의를 닮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거리의 투쟁이 제도를 열어왔고, 자립생활의 현장이 그 제도를 누군가의 하루로 운영해왔다. 나는 거리에 있었다. 비장애중심주의 사회와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일과 한 사람의 하루 곁에 있는 일은 같은 운동의 두 얼굴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건으로 먼저 만났고, 사람으로는 그가 죽고 나서야 만났다.
올려다본다는 것
지난 9월 17일 서대문하우스가 연 1주기 추모 포럼의 부제는 ‘한 사람의 삶의 여정에 마지막까지 동행하는 지역사회’였다. 어디까지를 마지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중환자실 문 앞까지인가, 장례를 기다리는 안치실까지인가, 아니면 다음 사람이 같은 이유로 죽지 않게 되는 날까지인가. 병원은 지역사회인가.
선을 긋는 쪽은 늘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선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다. 시위는 어디까지 봐줄 것인가, 예산은 어디까지 늘려줄 것인가, 병원 문턱은 어디까지 받아줄 것인가, 누구의 서명까지 인정할 것인가. 그러나 침대에 누워 그 문턱을 올려다보던 사람에게 그 선은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그는 23년을 천장 아래 누워 있다가, 3년 동안 자기 눈높이에 자기가 고른 것들을 하나씩 놓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시설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규정당해온 몸이 만든 세계였다. 그 세계는 최중증장애인도 탈시설해서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물리적 근거였다. 그런 그를, 국가가 만든 법의 공백과 그 공백을 채우지 않기로 한 병원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시설 안에서는 기관 대 기관으로 관계를 맺고, 장애인은 그 관계 속에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만 할 뿐이었다. 탈시설해서는 개인 대 기관으로, 자신이 기관을 선택하고 원하는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탈시설은 집을 선택하고, 일자리를 고르고, 건강을 관리할 방법을 스스로 정하는 관계로의 이동이었다. 그러나 병원은 아니었다.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상급종합병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관계는 단절되었고 지역사회는 거기서 삶의 동행을 멈추었다. ‘무연고자’라는 이유로. 병원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모두의 삶의 여정에 마지막까지 동행하도록 만드는 일. 그것이 그가 나에게 남긴 숙제다.
“그냥 내가 원할 때, 필요할 때, 씻고, 먹고, 자고,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서 집을 채우고, 이웃들과 웃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 이게 저에게는 ‘보통의 하루’예요. 그리고 저는 이 하루를 저만이 아니라, 누구든 느끼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서 내려다보는 자리에서는 그가 올려다보던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누워야 하얀 천장과 형광등이 보이고, 그가 “내가 고른 것들”이라 부른 눈높이의 태블릿이 보이고, 계절을 등진 창가의 침대가 보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야 병원이 내려다보며 긋는 선도 보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제야 그가 누워서 보고, 누워서 보여주며 만들어나갔던 그 세계를 뒤따라가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세계를 보고, 만들어나가고 싶다.
필자 소개
박주석. 전국장애인건강권연대 정책위원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20주년 기록위원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