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시·청각장애인의 영화 관람을 위한 편의 제공 책임에서 영화관을 지운 채 국가에만 책임을 물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지난 2017년 12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영화관들은 시·청각장애인의 영화관람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한 1심 재판부의 판결을 인권위가 후퇴시킨 것이어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2심에서 영화상영관들이 인권위 결정을 근거로 최근 조정안을 파기한 것으로 알려져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16일 인권위 앞에서 이러한 인권위의 결정을 알리며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또한, 이날 시각장애인 4명, 청각장애인 3명은 영화 관람에 있어 편의 제공을 하지 않은 CGV와 롯데시네마를 인권위에 다시 진정하며 인권위의 ‘올바른 결정’을 촉구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16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최근 장애인 영화관람 편의제공에 대한 진정을 기각한 인권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장애계 “차별 시정 기관인 인권위가 ‘법도 제대로 모르고’ 기각 결정 내려” 규탄
인권위는 지난 2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1조 제5항을 근거로 편의제공 의무를 지는 사업자는 제작업자와 배급업자라고 한정 짓고, 영화관은 그에 해당하지 않기에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행위는 차별로 보기 어렵다며 영화관을 상대로 한 장애인들의 진정을 기각했다. 결정문에서 인권위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시·청각장애인의 영화 향유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자막 및 화면 해설 등 정당한 편의제공을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오로지 국가에만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장추련 등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제15조에 따라 300석 이상 규모의 영화상영관을 운영하는 사업자는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반박했다. 장추련 등은 “인권위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근거해 법률상 장애인 차별의 시정을 책임져야 할 국가기관인데 장애인차별금지법 내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기각 결정을 내렸다”면서 “이렇게 버젓이 법 조항으로 편의를 제공하게 되어 있는데 ‘의무가 없다’며 기각 결정한 것은 법에 대한 이해도, 인권위의 역할도 모두 망각한 행위”라고 규탄했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는 “2심에서 법원의 조정 권고에 최근 영화관들은 ‘책임이 없다’며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그들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인권위가 기각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면서 “이번에 다시 진정하는 것은 인권위 결정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잘못된 결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김 상임대표는 “시·청각장애인이 영화를 못 본다는 것은 문화에서 배제되고 정보에서 소외되어 결국엔 차별받는 삶을 살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문화향유의 권리는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면서 “장애인 차별에 대해 영화관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인권위가 발전적인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천만 관객 앞둔 영화 기생충, 시·청각장애인은 못 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청각장애인들은 여전히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곽남희 씨가 인권위에 제출할 진정서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아 화제가 된 영화 기생충은 천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시각장애가 있는 곽남희 씨도 최근 영화관에서 영화 기생충을 두 번 보았으나, 두 번 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첫 번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이 있는 배리어프리 영화였고, 두 번째는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화면해설이 없는) 영화였다.
“첫 번째 본 영화는 화면해설은 잘 되어 있었지만 접근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영화관 내에 점자블록도 없고 영화관이 어디 있는지 안내하는 인력도 없었어요. 만약 활동지원사가 없었다면 영화관까지 가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화면해설 없는 일반 영화관은 더 심했습니다. 요즘 영화표를 매표소가 아니라 키오스크에서 끊잖아요. 그런데 키오스크엔 점자도 없고, 음성지원도 안 됩니다. 그날도 활동지원사가 있어 다행이었지만 안 그랬으면 영화표도 사지 못했을 거예요. 시·청각장애인 행사에서 화면해설 영화를 봤기에 두 번째 봤을 때 그나마 내용 이해는 가능했는데… 그게 없었다면 영화 내용을 전혀 이해 못 했을 겁니다.”
청각장애가 있는 김봉관 서대문구수화통역센터장도 기생충을 보러 영화관에 갔다가 허탕만 쳤다. 김 센터장은 영화관에서 티켓을 사면서 필담으로 ‘혹시 한글자막이 나오냐’고 문의했지만, 직원은 손모양으로 엑스를 표시하면서 없다고 했다. 김 센터장은 재차 ‘한글자막 나오는 날이 언제냐’고 물었지만 어떠한 답도 듣지 못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 센터장은 “2016년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은 수어를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로 인정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엔 현재 한국어와 수어, 두 개의 공식 언어가 있다.”면서 “그렇다면 두 개의 언어를 제공해주는 게 정당한 것 아닌가”라고 물음을 던졌다. 그는 “외국 영화 상영 시에는 한국자막을 꼭 틀어주면서 왜 한국영화에서는 (수어 사용자를 위한) 한글 자막이 없는가.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16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최근 장애인 영화관람 편의제공에 대한 진정을 기각한 인권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강혜민
시·청각장애인들이 한국영화 관람에 대한 편의제공을 요구한 것은 최근 일이 아니다. 2011년 농학교에서의 심각한 인권침해 실화를 담은 영화 ‘도가니’ 개봉 당시, 농인들은 정작 한글자막이 지원되지 않아 도가니를 볼 수 없다며 강하게 문제제기를 했다. 이는 인권위 진정을 비롯해 영화상영관을 상대로 한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졌고, 2017년 12월 마침내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영화상영관들은 시·청각장애인의 영화관람을 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며 시·청각장애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최근 인권위가 이러한 법원 판결을 뒤집은 결정문을 내놓은 것이다.
이태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함께걸음 미디어센터장은 “문화향유권은 헌법상의 권리인데 민간사업자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인권위 결정이 기가 막힌다. 인권위는 민간사업자들에게 이것이 바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고,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영화 볼 권리를 보장받도록 권고를 내려야 한다”면서 “헌법상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재진정한다. 인권위가 이번에도 무시한다면 우리는 인권위를 상대로 강력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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